
CONTROVERSY CREATES CASH
Moving Up
Pittsburgh
내가 8학년이던 1968년 아버지는 피츠버그(Pittsburgh)에서 취업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짐을 싸서 펜실베니아주(Pennsylvania) 교외의 펜 힐즈(Penn Hills)로 이사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간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디트로이트 살 때보다 확실히 나아진 중산층 지역에 살았다. 우리 집은 예전 집보다 두배는 넓어졌다. 마크, 로리, 내가 놀수 있는 지하층도 있었다.
뒷뜰엔 숲이 우거져 있어서 우리는 그 곳에 나무로 요새를 만들었고 밤이 되면 그 곳에서 야영을 하기도 하였다. 시냇가도 있어 우리는 거기서 가재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 곳은 도시의 거리와는 다르게 언덕과 산으로 둘러 쌓여서 멋진 광경을 연출했다.
토요일 오전에 방영하던 레슬링이 토요일 밤으로 시간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내 동생 마크와 나는 여전히 열광적인 팬이었다. 이때가 내가 처음으로 각 지역마다 각자 다른 "세계 챔피언"이 있다는 것을 깨닳았던 시기이다. 브루노 삼마티노(Bruno Sammartino)는 이곳 피츠버그 지역의 챔피언이었다.

피츠버그에서 "Born to be Wild"
삼마티노는 1959년에 레슬링을 시작했다. 1960년대엔 당시 WWWF라고 불렸던 단체(지금은 WWE)에서 활약 하였고 그때부터 이미 레전드 선수로 알려졌었다. 그는 당시에 정말 죽여줬다. 레슬러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삼마티노는 현실적이고 믿음직한 케릭터였다. 그는 노동자 출신이었다. 피츠버그는 철강 제조와 다른 산업들이 주업이었던 노동자들의 도시였다. 삼마티노는 그 계층을 실제로 대표하였고 그런 것들이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이유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내 친구와 나는 어떻게 그를 마주칠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바이크를 타고 그의 집 앞까지 가곤 했었다. 우린 그를 단 한번도 볼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집 근처에 산다는 특권 같은것을 느꼈었다.
펜 힐에 있는 학교는 내가 디트로이트에서 다녔던 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그 곳에서 실제로 싸운건 오직 레슬러로써였다. 나는 중학교때 126 파운드 급으로 처음 레슬링을 시작을 했다. 나는 평범한 레슬러였다. 정말 평범했다 - 끔찍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정말 평범했다. 하지만 난 레슬링을 즐겼다. 난 싸움을 통해서 성장했고 이러한 것은 조직 생활의 한 방법이었다.
또한 나는 일도 계속 해서 했다. 밥 라치오피(Bob Racioppi)라는 이름의 내 이웃은 나에게 허드렛일과 그의 집 주변에서 가벼운 건설일을 시켜주었다. 그는 내가 아버지와는 더 이상 함께 할수 없는 사냥같은 취미를 함께하는 나의 큰 형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마샬 아츠를 소개해주며 몇가지 동작들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나의 가라데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였다.
내가 14살때 그는 나에게 생애 첫 직업인 지붕 공사를 하는 회사에 취직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신용이라는것이 당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나의 아버지가 물려준 신용이라는 것은 나에게 매우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것은 성공을 불러 오는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내가 힘든일을 잘 해 낼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하고 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계속 발전될수 있게 지켜주신 어머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10학년이던 1970년, 나의 아버지는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에 새로운 직장을 얻으셨다. 난 정말 이 곳 피츠버그를 떠나길 원치 않았다. 나는 이 곳에서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이 곳을 내 고향처럼 느꼈었다. 하지만 나에겐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우리에게 집을 판매한 부동산 중계업자에겐 고등학교 레슬링팀에 소속된 나와 동갑내기인 아들이 있었다. 그 친구는 본인의 팀 코치와 팀 메이트들에게 나를 소개 시켜주며 내가 가입할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레슬링은 빠른 속도로 내가 학교를 좋아하게 된 몇가지 이유중에 하나가 되었다. 내가 중학교때 받은 훈련으로는 대회에 참가해서 결코 좋은 성적을 거둘수는 없었지만 나는 레슬링 자체를 즐겼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게다가 레슬링 팀에 합류하게 되면서 다른 지역의 클럽들과 경쟁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에는 모든 사람들이 마약을 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는 다르다. 나는 스스로 마약을 한적이 단 한번도 없었고 대부분의 내 친구들도 그러했다. 딱 한번 스피드(Speed)라고 불리는 암페타민의 일종인 마약에 혹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검은 미녀(Black Beauties)라는 마약을 하는 예쁘고 인기많은 여자를 알고 있었다.
내가 오전에 그녀를 보았을때 이미 그녀는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이후 그녀를 복도에서 다시 만났고 입에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맛이 가있었다. 말 그대로 축 늘어진 상태에서 입에서 피를 계속 토해내고 있었다. 이 모습은 나에게 마약에 대해서 확실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것 처럼 몇번의 시도는 해봤지만 난 다른 사람처럼 마약을 하는것에 좀처럼 흥미를 느낄수 없었다. 자리에 앉아서 멍청한 웃음을 흘리면서 티비를 보고 다음날 무슨일인지 기억도 못하는것 같은 모습은 나에겐 그다지 어필이 되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건 모터 사이클을 타는 것이다. 10살때 미니 바이크로 처음 시작을 해서 16살때 미니 바이크를 졸업하고 모터 사이클로 갈아 탔다. 내 첫 바이크는 혼다 160이라는 모델이었는데 곧 혼다 슈퍼호크(Super Hawk) 모델로 교체를 했다. 혼다 슈퍼호크는 오버 캠, 305cc의 엔진, 9,200 RPM의 레드라인을 자랑하는 1960년대 획기적인 모터사이클이었다. 나는 가와사키 900(Kawasaki 900) 모델로 갈아타기 전까지 점점 크고 빠른걸로 바이크를 교체하면서 대략 6개 정도의 바이크를 갈아치웠다. 500 파운드의 무게에 82 마력의 힘을 지닌 가와사키 900은 로켓이었다.
내가 바이크를 이용해서 했던 일 중에 가장 미친짓은 가와사키로 점프를 시도했던 일이다. 내가 점프를 시도 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그런 무거운 바이크가 다른것들 처럼 점프가 가능할지 궁금해서이다. 3~4번째 시도 했을때 나의 바이크는 공중에서 부숴져서 내 친구집 옆 차고에 쳐 박혀 버렸다. 나는 훌륭한 바이크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그 이후로 두번 다시는 바이크로 점프를 시도하지 않는다.
버네 가니에(Verne Gagne)¹의 올스타 레슬링 쇼(All-Star Wrestling Show)는 당시 미네소타 지역의 레슬링 쇼였는데 나는 이 쇼를 매주 토요일 저녁 6시에 빼먹지 않고 꼭 시청 했었다. 전직 해병이자 아마츄어 레슬러였던 버네 가니에는 1948년에 본격적으로 프로 레슬링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1960년 AWA(American Wrestling Association)²를 설립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가장 강력한 단체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AWA는 미네소타 뿐만 아니라 중서부 지방인 라스 베가스, 샌 프랜시스코등의 큰 도시와 몇개의 작은 도시들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빈스 맥마흔과 버네 가니에
버네와 그의 아들인 그렉 가니에(Greg Gagne)는 닉 복윙클(Nick Bockwinkle), 치프 와후 맥다니엘(Chief Wahoo McDaniel), 래리 "더 액스" 해닉(Larry "The Axe" Hennig), 바론 폰 라쉬케(Baron Von Raschke), 래리 "더 크리퍼" 스티븐스(Larry "The Cripper" Stevens) 같은 주요 선수들과 다른 스타들을 보유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AWA가 미네소타에서 개최한 몇번의 큰 흥행들을 즐겁게 봤던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쇼는 매년 추수 감사절에 개최했었는데 하루 종일 배가 터지도록 먹은 뒤에 집에 둘러 앉아서 레슬링을 시청 하곤 했었다.
나는 내가 학교에서 레슬링을 하면서 한번인가 두번정도 버네 가니에를 만났었다. 버네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3마일 떨어진 미네소타의 마운드(Mound)라고 불리는 작은 도시에 살았다. 우리는 버네 가니에를 볼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부루노 사마티노에게 했던것 처럼 차를 타고 버네 가니에의 집 주변을 맴 돌았었다.
내가 고등학교때 나의 AAU(Amature Athletic Union) 자유형 레슬링팀은 미국 순회중인 스웨덴 팀과의 대항전에 선발 되었다. 우리는 티켓을 팔고 홍보를 해야했지만 홍보를 위한 자금이 없었다. 버네는 종종 자신의 쇼에서 다른 아마츄어 팀이 홍보를 할수 있는 기회를 주는등, 아마츄어 레슬링에 대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요청을 하면 혹시나 그의 쇼에 출연시켜주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AWA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고 왈리 카르보(Wally Karbo)³와 이야기를 나눴다. 왈리 카르보는 집에서 시청자들이 보는 흥행을 추진하는 AWA의 "얼굴"이었다. "저는 에릭 비숍입니다" 안내원이 카르보에게 전화를 바꿔 주었고 나는 그에게 이야기 했다. 내 입에서 속사포 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스웨덴 팀과 결전을 앞둔 미네통카 레슬링 팀(Minnetonka Wrestling Team)인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혹시 내가 쇼에 출연하여 우리의 시합이 언제 어디에서 개최되는지 사람들이 알수 있게 인터뷰를 하고 티켓을 좀 팔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이지 꼬마야." 그는 나의 숨 넘어가는 소리에 대답했다. "스튜디오로 오면 내가 널 방송에 내보내 주마." 나는 믿을수가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내 친구들과 나는 토요일 아침에 채널 11로 갔다. 도착해서 약속 시간이 될때까지 건물 밖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렉 가니에와 짐 브런젤(Jim Brunzell)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AWA에서 하이 플라이어로 활동하며 태그팀 챔피언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와후 맥다니엘, 레이 스티븐스, 래리 해닉을 볼수 있었다 - 우리는 이 모든 스타들을 개인적으로 보았다.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고 우리는 그들이 출연하는 쇼에 우리도 나가게 될 것이란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말이다.

AWA의 로고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우리에게 TV 카메라 근처의 스튜디오 내부 대기 장소로 안내했다. 당연하게도 왈리 카르보와 마티 오닐(Marty O'Neill)이란 이름의 아나운서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마티는 오래된 담배와 스카치 위스키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자극적인 목소리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지금 당장 무슨일이 일어날거 같은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60~70대로 보이는 외모와 150 정도의 키, 그리고 학교 축제에서 볼 수 있는 호객꾼 같았다. 마티는 모든 인터뷰를 담당하는 AWA의 "호객꾼" 이었다.
카메라는 우리와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돌아가고 있었고 마티는 왈리 카르보를 인터뷰 하기 시작했다. 왈리가 말했다.
"예 마티, 이곳에 지금 모시고 싶은 손님이 한명 있는데 그에겐 뭔가 할말이 있다고 하는군요. 그의 이름은 에릭 비숍입니다. 에릭 이리와보게."
그래서 거기로 갔다. 나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전할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나는 죽을만큼 떨렸다 -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기도 했었다. 우리가 그 시합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가 굳은 각오로 임했다는것은 확실하다. 유럽인들은 자유형에서 우리보다 뛰어났다. 그것이 나의 첫 TV 출연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당신이 생각할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나는 불도져와 덤프 트럭을 운전했고 팬 케익을 구웠으며 동물 병원에서 개, 고양이, 원숭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청소도 했다. 학교 다닐때는 파트 타임으로 여름에는 풀 타임으로 돈 벌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했었다. 나는 공부에는 정말 취미가 없었다. 레슬링이 아니었다면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돈을 버는것이 수업보다 중요했으니 말이다. 나는 당시에 명확하게 생각을 정리 할 수는 없었지만 공부는 결코 내 길이 아니었다.
내가 졸업반이던 1973년 나는 레슬링을 하던 조 보이어(Joe Boyer)라는 친구에게 내 무릎이 박살 났었다. 조는 정말 강했다 - 죽을만큼 강했다. 그는 엄청난 상체 근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게 중심이 낮아서 내가 그를 쓰러뜨리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린 서로 엉겨붙으며 경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측면 드랍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압도하며 오히려 역으로 측면 드랍을 시도했고 내 상체가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 쏠리면서 내 오른쪽 무릎이 나가버렸다.
뻑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고 이내 조용해졌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고통은 없었다. 내 다리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것 처럼 느껴졌다. 내 무릎은 작은 멜론처럼 부풀어 올랐다. 지금까지도 내가 그때 정확히 뭘 했는지 모른다. 이후 몇년동안 나는 재부상을 아마도 2~3회 정도 당했다.
나는 결코 수술을 받거나 쳐다보는것 조차 하지 않았다. 70년대 무릎 수술은 오늘날 처럼 발전되지 않았었다. 당시 많은 친구들이 부상을 당해 수술을 하였는데 수술을 하지 않는것 보다 더 나쁜 결과를 얻곤 했다. 나는 그냥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었다. 그 여름의 레슬링 이후로 내 무릎은 나를 끈덕지게 괴롭혔고 나는 정기적으로 일을 할수 없게 되었다. 이후로 나의 아마츄어 레슬링 커리어는 거의 끝났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자 나는 불현듯 내 모든 친구들이 대학으로 진학할 것이라는걸 깨닳았다. 나는 대학 진학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신이 열일곱에서 열여덟살때 주변 친구들은 당신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들이 모두 가버린다는것을 깨닳는다면 당신은 그 친구들과 함께 가야만 한다고 여길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가장 친한 친구중 한명은 미네소타 북동쪽으로 한시간 거리에 위치한 세인트 클라우드(St. Cloud)의 세인트 클라우드 대학에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 곳에 지원했고 몇몇의 이유와 함께 -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들은 나를 받아 주었다. 내 친구와 나는 기숙사에 배정되었고 나는 그 곳에서 공부는 신경쓰지 않은채 오로지 파티만을 하면서 보냈다.
나는 그 곳에서 내가 뭔가를 해야한다는 조금의 이유도 찾지 못했다. 거의 모든 시간을 파티로 보내거나 화물 운송회사에서 화물차로 자재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재미없는 일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맥주와 피자를 먹을수 있었다. 멋진 신입생 시절을 보냈지만 더 이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곳을 떠나야만 했다. 나는 미네소타 대학으로 전학을 갔고 덕분에 집에서 지내면서 다시 돈을 모을수 있었다.
주1. - 버네 가니에는 잘 알려진대로 AWA의 설립자이며 WWE에 의해 2006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주2. - AWA는 1960년에 설립하여 1991년 단체가 패망할때까지 헐크 호건등의 선수들을 발굴하며 많은 스타들을 거느린 인기 프로모션이었다. 당시엔 WWF, NWA, WCCW등의 단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슈퍼스타들이 연이어 타 단체로 영입되어버리고 단체의 운영 재정이 바닥 나버리면서 영광의 역사를 뒤로하고 패망에 이르게 된다.
주3. - 본문에선 단체의 얼굴 정도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왈리 카르보는 버네 가니에와 함께 AWA의 공동 설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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